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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회생활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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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진년 10월 양산 형방이 김해 형방에게 보내는 의송(議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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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서정보 테이블
문서명 경진년 10월 양산 형방이 김해 형방에게 보내는 의송(議送)
문서종류 의송 발급년도 경진(庚辰)년 10월
발급자 양산형방 김(압)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경진년 10월 17일 양산(梁山) 형방 김모(金某)가 김해 형방에게 보내는 답통(答通)과, 양산 형방이 등서하여 보낸 이정인의 의송과 그에 대한 양산관(梁山官)의 제사가 하나의 문건으로 작성된 문기이다.

답통의 내용은 ‘이정인(李精寅)이 올린 의송의 내용과 제사를 등서하여 보내라고 행군수께서 처분하셨으므로 이에 따른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등서하여 보내는 문서는 제목을 ‘이정인 의송 장사(狀辭)’라 쓰고 내용을 옮겨 적었다.

의송의 내용은 ‘이정인의 부(父)가 명지도(鳴旨島)에 사는 최철종(崔喆宗)․이징(李澄)의 부(父)에게 염전을 錢 720냥에 방매하였으나 당시 200냥만을 받고 나머지 520냥은 가을에 본리(本利)를 갖추어 받기로 하고 수표를 받아두었다. 그런데 그 사이 양쪽 부(父)가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염전 값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관에 의송을 올렸다가 의송한 죄로 장(杖) 25도(度)에 처하는 등 잔민으로서 억울한 지경에 놓였다. 그러니 잘 조사하셔서 염전을 다시 찾아주시거나, 520냥을 본리를 갖추어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뒤에 이 의송에 대한 제사도 등서하였는데 ‘최?이 두 사람을 관에 붙잡아와서 장자(狀者)와 대질하여 상세히 조사한 후 결급함이 마땅하다’는 양산관의 제사였다.

5군데에 정방형의 관인이 찍혀 있으며, 뒷면에는 ‘김해 형방 개탁’이라고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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