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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옛문서란?

원래 문서는 특정한 대상, 목적을 전제로 작성한 것을 말한다. 즉 갑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 내용을
글로 작성하여 을이라는 사람에게 전달한 것이 문서인 것이다.

그러나 사료로서의 옛문서 즉, 고문서는 이보다도 포괄적으로 정의된다. 즉 1945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1차사료로서 유일한 가치를 갖는 필사된 기록은 모두 고문서로 분류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궁중, 관아 ,서원, 문중 및 개인간에 주고 받은 공.사문서가 포함되며 그 내용과 종류는 매우 방대하고 다양하다. 또 개인의 의지만을 담은 일기류, 비망록류, 추수기 등의 치부기, 사관들의 사초및 많은 필사기록고 고문서에 포함된다. 이러한 고문서는 남에게 굳이 보이려고 한 것도 아니고, 또 저술이나 간행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 경제적인 이면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는 고문서는 어떤 문헌자료보다 現時性과 구체성, 정확성을 갖고있다. 이로 인해 '조선왕조실록' 등 정서에 나와 있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 주거나 때로는 종래의 정설을 수정해 주거나 보완해 주기도 한다. 때문에 고문서는 법제사, 사회사, 경제사, 생활사, 지방사, 국어사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옛문서 생활사 박물관'의 특징은 고문서 중에서 근대시기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근대문서를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활사박물관의 근대문서는 20세기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주로 일제식민지기- 몇 개 가문이 살아낸 일상생활, 사회, '국가' 생활의 흔적이다.물론 가문의 위세와 지행, 문서 작성시기에 따라 자료가 말해주는 '생활'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누구나 미나미 총독에 감사장을 박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없고, 아무나 경일은행 주주회의 통지서를 받지는 못할 것 이기때문이다. 이런 점을 차치하고 근대문서 전체를 대별하면,

이로서 이 문서를 남긴 사람들의 상을 그려보면, 대체로 근대교육의 열의가 있었고, 은행,금융조합 등에서 돈을 빌려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벌였으며, 그러다 차용금을 변제받지 못해 담보로 제공한 논밭을 처분하기도 하였다. 조상을 위해 石物을 구입하기도 하고, 묘비규칙 실시즈음해서는 분묘로 인정받기 위해 헌병대에 묘적계를 제출하기도 한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적당히 시국에 타협하여, 애국헌금을 내고 감사장을 받거나 애국공채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결국 식민지배에 적당히 순응하면서도 근대적 제도나 현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반응 하는 인간의 모습이 떠오를것이다. 물론 위에서 그런상은 스케치에 불과하다.만약 자료를 남긴 사람의 개성을 알 수 있다면 자료가 만들어질 때 이사람이 드러낸 감정과 표정 또한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