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생활문서
조선시대
유배의 고초를 겪은 갈암 이현일의 무고함을 밝힌 답문
문서명 | 유배의 고초를 겪은 갈암 이현일의 무고함을 밝힌 답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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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종류 | 답문 | 발급년도 | 연도미상 |
발급자 | 미상 | 소장처 | 한국 국학 진흥원 |
혹자(或者)의 물음을 통해 갈암(葛庵)이현일(李玄逸)의 학문세계와 출처관등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자신의 계발에 매진하였던 분이 불우하게 생을 마친 것은 당시의 붕당(朋黨)에 의한 정치적인 논리에 의한 것임을 밝혀내고 있다.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본관이 재령(載寧),자는 익승(翼昇),호는 갈암(葛庵)이다.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출사를 단념하였다. 이후 공조정랑·이조판서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축출되자 유배된 후,현재의 안동인 금양으로 돌아와 후진을 지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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