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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회생활문서

사회생활문서

조선시대
정유년 김창섭 등이 성주에게 투매한 묘의 굴이(掘移)를 청원한 상서(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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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서정보 테이블
문서명 정유년 김창섭 등이 성주에게 투매한 묘의 굴이(掘移)를 청원한 상서(上書)
문서종류 상서 발급년도 1897
발급자 김창섭 (金昌燮)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이 문서는 정유년(1897, 광무 원년) 3월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 거주하는 유학 김창섭(金昌燮) 등 풍산 김씨가 사람들이 선산에 투매(偸埋)한 묘의 굴거(掘去)를 관에 청원한 상서이다.

이 상서에서는 어떤 완악한 사람이 선산의 내청룡(內淸龍)에서 불과 수십보 거리의 가까운 곳에 투매하였다는 것과 이에 대해 이전에 두 차례 올린 소지와 제사 내용을 기술하며 수령에게 투매한 묘를 곧바로 파내도록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전 두 차례 소지의 제출 대상과 제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전 성주에게 소지를 올렸는데, ‘표를 10일간 세우고 다시 소지를 올리라’는 제사를 내렸다.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주가 바뀌게 되어 두 번째로 암행어사에게 소지를 올리니 ‘새로운 수령이 오기를 기다려 독굴(督掘)하라’는 제사를 내렸다.

투매한 묘를 굴거하게 해 달라는 이 상서에 대해서 새로 부임한 수령은 ‘암행어사의 제사에 의하여 마땅히 바로 독굴하여야 하나 무덤의 주인을 알지 못하니 어찌 굴이하겠는가? 산도를 가지고 오라’는 내용의 제사를 내렸다. 수령들이 표를 세우도록 하거나 주인을 알지 못하니 굴이할 수 없다고 하는 제사를 내린 것은 조선시대에 다른 사람의 묘를 파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풍속 때문에 조선 후기에 산송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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