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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활문서

교육생활문서

조선시대
1690년부터 1810년까지 구강서원의 운영에 든 물품과 그동안의 임원 등을 기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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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서정보 테이블
문서명 1690년부터 1810년까지 구강서원의 운영에 든 물품과 그동안의 임원 등을 기록한 책
문서종류 고왕록 발급년도 1690
발급자 구강서원(龜岡書院) 소장처 경주 양월 경주이씨종가

1810년(純祖 10)에 경주(慶州) 구강서원(龜岡書院)에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을 모시게 된 경위와 1690년부터 1810년까지의 서원 운영에 든 물품 및 서원의 임원들을 기록한 책이다.

표지의 “고왕록(考往錄)”은 지난 일을 참고하기 위해 기록해놓은 기록물이라는 뜻이다. 문서의 첫머리에는 구강서원에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게 된 경위를 기록해놓았다. 1690년 경주지역 선비들이 선생의 관향(貫鄕)에서 선생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선생의 화상을 충청도 보은(報恩)에 사는 후손 이담경(李覃慶)의 집에서 모사하게 하고 이를 서원에 모시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의 초상은 선생 나이 33세 때인 1319년 중국 강남(江南)에 강향사(降香使)로 가는 고려 충선왕(忠宣王)을 따라갔다가 충선왕의 명으로 항주(杭州)의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것이다. 그 후 1350년에 충목왕(忠穆王)의 후사 문제로 외교문서인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에 갔다가 옛날 초상을 보고 감회에 젖어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보은에 선생의 영당(影堂)이 있는데, 이는 선생의 후손인 이경억(李慶億)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창건한 것이라고 하였다.

초상을 그리는데 들어간 물품을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초상을 모사한 유사의 이름, 보은에 다녀온 비용과 임시 봉안소를 수리하는데 드는 비용 등을 기록하고, 서원 및 영정 등을 수리하는 데 든 비용과 서원에 물품을 댄 사람 및 단체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1690년부터 1810년까지 이어지고 있어 시기별 구강서원에서 소용된 물품과 비용, 관련 임원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제현(1287-1367)은 고려의 시인·성리학자이다. 호는 익재(益齋)·실재(實齋)·역옹(櫟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에 장원, 이어 대과에 합격했으며, 1319년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저서로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2권이 전한다. 경주의 구강서원과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경억(1620-1673)은 이제현은 12세손으로 호는 화곡(華谷),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644년(仁祖 22) 25세의 젊은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사서, 대사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고 1672년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저서로는 『화곡유고(華谷遺稿)』가 있다.

이 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01-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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