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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가족생활문서

가족생활문서

조선시대
1814년에 사간원에서 김령의 시호를 서경한 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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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서정보 테이블
문서명 1814년에 사간원에서 김령의 시호를 서경한 단자
문서종류 물목단자 발급년도 1814
발급자 순조(純祖)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1814년(純祖 14) 9월에 사간원(司諫院)에서 김령(金坽)에게 내린 시호(諡號)를 서경(署經)한 서경단자이다.

『순조실록(純祖實錄)』 13년 9월 15일 기사에는 영남 유생 김성련(金星鍊) 등이 도승지에 증직된 김령의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순조는 김령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여 ‘문정(文貞)’의 시호를 내리게 된 것이다.

시호를 내리기 위해서는 예조(禮曹), 봉상시(奉常寺), 홍문관(弘文館), 이조(吏曹), 의정부(議政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을 거쳐 최종 결정된다. 이 문서는 증시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증시를 받는 사람의 행적과 해당 시호의 적부(適否)를 사간원에서 심사한 것이다. 서경에는 사간과 정언 2인 참여하였다.

시호인 문정의 의미는 ‘도덕박문(道德博聞) 청렴수절(淸廉守節)’로, 도덕박문은 도덕이 깊고 학문이 넓다는 뜻이고, 청렴수절은 청렴하고 절개를 지킨다는 뜻이다.

김령(1577-1641)은 본관이 광산(光山),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으로, 김부륜(金富倫)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유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하였다. 1612년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위된 뒤에는 벼슬하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689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계암집(溪巖集)』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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