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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가족생활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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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1607년에 광해군이 유성룡의 죽음을 애도하고 내린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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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서정보 테이블
문서명 1607년에 광해군이 유성룡의 죽음을 애도하고 내린 제문
문서종류 제문 발급년도 1607
발급자 광해군(光海君)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1607년(宣祖 40) 6월에 광해군이 왕세자의 신분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죽음을 애도하여 내린 제문(祭文)이다.

『속대전(續大典)』 예전(禮典), 치제조(致祭條)에는 문관, 무관, 음관(蔭官)으로 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자에게는 모두 임금이 제문을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고 있다.

광해군은 유성룡(1542-1607)이 1607년 5월 13일에 하회(河回)에서 돌아가시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유항(柳恒)을 보내 제문을 내렸다. 제문에서는 유성룡의 품성과 관직 생활에 대해 기술하고, 유성룡의 죽음으로 백성들이 실망하고 사림이 오열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대신 신하를 보내 제문을 올린다고 하였다. 제문은 선조(宣祖)가 제문을 내린 이틀 뒤인 6월 10일에 내렸다.

유성룡은 156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고,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599년에 하회에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1629년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

이 제문은 풍산류씨가의 다른 고문서·전적과 함께 보물460-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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